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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탑수영장길, 그리고 미지의 땅

낯선 여정 혹은 무모한 도전

2023. 03. 22 by 차철호 기자

“저기 물가 따라 쭉 갈 수 있지 않을까?” 
내탑수영장길 반환점이자 하이라이트인 옛 내탑수영장 모래곶. 김밥에 컵라면, 점심을 금세 해치운 일행은 농반진반의 대화를 나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건 싫다, 저기 보이는 호반 물가 따라 사성동 붕어섬 앞까지 가보자는 얘기다. 길이 이어질까, 위험할 수도 있는데…. 가볼까? 진짜 가? … 가보자! 허튼소리가 ‘실화’가 되는 순간이다.

#1. 미지의 땅

일행 4명은 2명씩 나눠 한 팀은 5-1구간 원래 코스대로 회귀하기로 하고, 다른 한 팀은 호수와 뭍의 경계를 밟으며 가기로 했다. 멀지 않아 보였다. 물가 따라 가다보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가보는 길의 설렘과 ‘도전’에 대한 전투력. C와 K는 늠름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초반부터 헉, 소리가 나왔다. 보이지 않던 난관이 잇따라 등장했다. 뭍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골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 정도야, 몸 풀듯 툭툭 건너간다. 물 앞을 바로 걷기도 하고 바위로 된 경사면을 지나기도 하고 편안한 모래언덕을 밟기도 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니 자신감이 충만하다. 사람 발자국은 없고 야생동물 발자국만 있는 미지의 땅은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비슷비슷하면서도 다른, 신세계를 걷고 있다.

 

#2. 그 바위

걸음걸음 내디딜 때마다, 얼마큼 왔나 뒤돌아본다. “벌써 많이 왔네.” 목적지인 붕어섬이 그다지 멀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이대로라면 원코스로 회귀한 팀보다 훨씬 빨리 도착할 것 같다. 감탄사는 이어진다. 숨은 비경의 설렘은 흥분으로 이어지고 몸은 전혀 힘들지 않다. 갈수록 힘이 난다. 끊이지 않는 감탄사와 웃음소리. 그리고 드디어 그 바위를 만났다. 

출발할 때, 저기는 어떻게 통과하지? 했던 경사가 급한 바위다. 처음엔 산 위쪽으로 올라가 통과할 계획이었다. 막상 눈앞에서 보니 만만했다. 하지만 역시 만만찮았다.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 ‘네 발’로 넘어간다. 겁많은 아이처럼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표정은 몸짓보다 더 가관이다. 이때, 앞서 건너간 K가 영상을 찍고 있다. “이런 건 찍지 말라고! 너무 쭈글쭈글해 보이잖아, 호기롭게 건널 때만 찍으라고~!” 어쩌면 K는 C가 쭉 미끄러져서 두 발이 물에 담기는 장면을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3.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이국적인 풍경은 몸과 마음을 쉬게 한다. 고비를 넘길 때마다 에너지는 충전된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다. 전화가 왔다, 얼마큼 갔냐고. 20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어. “으잉? 벌써?” 하산 못한 팀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C와 K는 그제서야 씩씩하게 지도앱을 열어 현재위치를 확인한다. 아니, 뭐지. 거의 다 온 줄 알았는데 아직이다. 지도상으로 한참 남았고 게다가 깊은 골까지 다가온다. 붕어섬은 눈앞에 들어오는데 갈 길이 아직 멀었다. 설레발이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

지도에 천장골이라 표시된 곳 부근 깊고 넓은 골을 통과한다. 지도보다, 생각보다 깊다. 길다. 사기가 한 풀 꺾인다. 그래도 여기만 지나면 결승선 골인의 쾌감을 맛보리라, 기대 그대로의 기대는 심신을 부추긴다. 다시 걷는다. 저 앞에 나무 몇 그루가 언덕 위에 폼나게 서있다. 멋있다.

황홀한 풍광은 언제나 에너지를 던져준다. 깊은 골 끝에 근사한 바위가 멀리서 보인다. 다행히도 올라야 할 바위는 아니다. 물가 뒤편에 수직으로 서있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앞에 수평으로 누워있는 널찍한 바위가 쉬어가라, 한다. 환상적인 포인트다. 햇살 좋은 날 멍 때리기 딱 좋다. 상상도 해본다. 늦은 밤 여기에 누워 보는 밤하늘, 별이 쏟아진다. 

#4. 내탑동 타임머신

물 한 모금, 조금 긴 휴식을 마치고 나선다. 다시 걷는데, 유독 눈에 띄는 발자국 앞에 섰다. 크다, 깊다, 선명하다. 숲에서 물가로 이어져 있다. 앞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돌출된 형태가 두드러져 보인다. 멧돼지 같다. 조금 더 가니, 오래 된 소주병 하나가 모래 속에 묻혀있다. 금복주 브랜드가 새겨진 소주병. 30년은 족히 넘은 듯하다. 그 옆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설물’이 보인다. 땅 속을 뚫어 짧게 파고든 모양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건 아니고 인위적으로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궁금하다. 어떤 용도였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하다.

깊고 큰 발자국. 숲에 사는 멧돼지가 물 먹으러 왔나.
깊고 큰 발자국. 숲에 사는 멧돼지가 물 먹으러 왔나.
오래 된 소주병. 
오래 된 소주병. 
저 곳은 어떤 용도일까, 궁금하다.
저 곳은 어떤 용도일까, 궁금하다.

또 한 번의 모퉁이를 돌아선다. 지도상에서 깊은 골을 보여주는 곳이다.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한다. 헉, 거리가 장난이 아니다. 한참을 돌아나가야 한다.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이젠 지친다. 한참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래도 가야지, 거의 다 왔잖아. 서로를 응원하며 다시 걷는다. 생각보다 더 길고, 더 험하다. 지도에 ‘신앙골’이란 지명이 새겨져 있다.

#5. 붕어섬을 앞에 두고

긴 둘레를 돌아 나왔을 무렵 다시 전화가 왔다. 만나기로 한 목적지, 사성동 붕어섬 근처에 도착했다고. 어디냐고. “생각보다 멀어,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어.” 최대한 속도 내서 간다고 답하고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다시 깊은 골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이번엔 정말 건너가기 힘든, 위험한 구간이었다. 선택의 순간, C·K는 결국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생존의 문제였다. 애초 계획한 구간을 고집했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다시 전화, “우린 글렀어, 원점으로 갈테니 둘이 붕어섬 근처 갔다가 나오는 게 좋겠어.”

지도를 열어 나갈 길을 찾았다. 산 위쪽으로 길을 밟으니 다행히도 주변엔 묘지가 많았고, 이어진 길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왜정골을 지나 5-1구간 출발점인 와정삼거리로 이어지는 길. 아스팔트를 밟아 몇 걸음 안 돼 원점회귀 했다. 와정삼거리 출발지부터 9㎞, 내탑반도부터 6㎞. C·K는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아, 결국 무모한 도전이었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정, 그래도 좋았다. C·K는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고 동지애는 더욱 딴딴해졌다. 다음날 만난 C·K, 또 농반진반의 대화를 나눈다. 다음에 다시 가볼까?

차철호·김동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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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2023-05-09 10:05:32
기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사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여행을 즐기시는 분들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합니다. 계속 좋은 기사 부탁드리고, 가능하다면 충북지역도 취재 부탁드립니다. 대청호 오백리길 전체가 살아나려면 충북지역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요?